허임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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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임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이 있었던 선조 광해군 인조 시기에 침의(鍼醫)로 큰 명성을 떨쳤던 침뜸술의 대가입니다. 그의 저술인 침구경험방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여러 고문서를 통해 그의 생애를 대강 그려볼 수 있습니다.

 허임은 1570년경 서울에서 출생하여 1647년경에 충청도 공주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론되고 있습니다. 허임의 묘는 원래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에 있던 것을 그의 부모 묘소와 아들의 묘소가 있는 공주군 우성면 한천리 무성산으로 1981년에 이장되어 있습니다.
허임이 저술한 침구경험방 서문 끝부분에 하양허임(河陽許任)이라고 밝혀 하양(河陽)이 그의 본관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임의 출신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부친은 허억봉 혹은 허억복이라는 이름의 악공(樂工)으로 관노(官奴) 출신이고, 그의 모친은 사비(私婢)였다고 전합니다.

<초년과 중년>

침구경험방 서문 : "어려서 부모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하며 오랫동안 노력하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이 틔였다."


 허임은 자신이 침술을 배운 동기에 대해 침구경험방 서문에서 "어렸을 때 부모님의 병 때문에 의원의 집에서 일을 해주며 오랫동안 노력하여 어렴풋이나마 의술에 눈이 틔었다"고 털어놓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그는 침구술을 제도권의 교육기관에서 배우지 않고 의원에게서 직접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악공 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부모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풀이됩니다.
허임의 아버지 허억봉은 당시 조정에서 악공을 시험하는 악보(금합자보)를 만드는 데 참여할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악공이었고, 나중에는 장악원의 최고 악사인 전악까지 지냈습니다.

 허임은 약관의 나이에 침의로 발탁되어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수행하며 침치료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가 왕실의 침의로 실록에 이름이 나타나는 시작한 시기는 1598년(선조31년).
이후 허임은 우수한 침술치료효과 때문에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출신성분을 뛰어넘는 인사조치에 대한 관료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반(東班)의 위계(位階)에 이르렀고 경기지방의 요지에 수령으로 제수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왕실과 사대부, 서민들의 위급한 치료에 대응하기 위해 의원들을 수도권 100리 이내에 배치하던 관행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실록에 따르면 임금의 파격적인 인사조치에 대해 사간원과 사헌부의 끈질긴 반대가 반복되었으나, 선조와 광해군의 신임 또한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허임이 대략 30대 중반 되던 때인 1604년 9월 야간에 발병한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공으로 6품에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습니다.

 1612년 광해군 4년 허임이 40대 중반 무렵 임진왜란 중 선조를 시종한 공을 인정받아 3등 공신으로 되고, 허준과 함께 의관록에 기록되었습니다. 이후 1616년 영평현령(현재 경기 포천지역), 양주목사, 부평부사(1617년)를 거쳐 1622년에는 남양부사(현재 경기 수원, 화성 일원)에 특별히 임명되는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왕궁의 침의와 지방 수령까지 지낸 그였지만 광해군이 “그는 어미와 함께 사는데 궁핍하여 생활할 수 없는 처지” 라고 걱정할 정도로 청렴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임의 중년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문인들의 문집에 간간이 나타나 있어서 그의 행적을 대강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난 허임 관련 기록]
(나이는 1570년 생으로 추정하였음)

1593년(24세, 선조26년) 임진왜란 중이던 계사년(癸巳年) 광해군(光海君)의 서남행시에 수행하여 11월에는 해주에서, 12월에는 삼례역(參禮驛)에서 3일 간격으로 침 치료를 시행함.

1595년(26세, 선조28년)
11/1 침의(鍼醫) 출신의 박춘무가 군수로 있는 전라도 임천 방문. 허 교수(許敎授)라는 호칭으로 불림. <쇄미록>
※ <쇄미록>에 "침술(鍼術)을 배워서 종기를 고치는 교수(敎授)가 되었다"고 표현되어 있음. 의학교수 = 종6품 주부, 전의감 혜민서 소속.

1598년(29세, 선조 31년)
9/22 ‘침의 박춘무·허임이 모두 무단히 출타 중’이라며 침의(鍼醫) 허임(許任)이라는 호칭이 선조실록에 처음 나타남.

1601년(32세, 선조 34년) 의관 허준 등과 함께 입시(入侍)하여 선조의 침 치료에 참여함.

1602년(33세, 선조 35년) 6/12 고향에 물러가 있음. 침을 잘 놓아 일세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으로 침의(鍼醫) 김영국(金英國)ㆍ박인령(朴人?)과 함께 언급됨.

1603(선조34년) 의정부 우찬성 심희수(호 일송)에게 침을 놓다. <일송선생문집>

1604년(35세, 선조 37년)
9/ 23 선조의 갑작스런 편두통으로 야간(夜間) 진료. 아시혈(阿是穴)에 대한 평소 허임의 견해를 허준이 언급함.
10/ 23 편두통을 치료한 공으로 포상을 받음. 6품의 직에서 당상(堂上; 通政大夫)으로 전격 승진. 당상관(堂上官)은 지나치다는 여러 신하들의 간쟁(諫諍)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1606년(37세, 선조 39년)
4/ 26ㆍ29, 5/ 2ㆍ4ㆍ6일 연속 다섯 차례에 걸쳐 어의(御醫) 허준, 조흥남(趙興男), 이명원(李命源) 등과 침의(鍼醫) 남영(南嶸), 김영국과 함께 입시(入侍)하여 선조를 침 치료 함.
9/ 14ㆍ16ㆍ18ㆍ20일에도 입시하여 진료함.

1609년(40세, 광해 원년)
10/8~15 새로 즉위한 광해군에게 재능과 공로를 인정받아 마전군수(麻田郡守)에 임명했으나 사헌부가 매일같이 반대를 하여 곧바로 물러나게 됨.
10/16 실첨지(實僉知)에 임명하고, 당시 모친을 봉양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어 광해군이 연명할 수 있도록 우선 그 품계에 준하는 녹을 주라고 함.

1610년(41세, 광해 2년)
2/ 24 광해군이 침의 허임ㆍ김영국 등을 불러 서울 안에 머물게 함.
3/ 12 전라도 나주(羅州)의 집에 있음. 올라오도록 전교(傳敎)를 여러 차례 받고도 명을 따르지 않아 사간원이 광해군에게 허임의 국문을 건의했으나 광해군은 따르지 않음.
3/ 13 허임의 몸에 전부터 중병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됨.

1612년(43세, 광해 4년)
8/ 9 서로(西路)에서 남하할 때 호종(扈從)했던 공로로 가자(加資) 받음.
9/ 21 계사년(癸巳年; 1593년) 광해군의 서남행시에 수행하며 침 치료를 한 공로로 3등의 녹훈(錄勳)에 수록됨.

1614년(45세, 광해 6년)
6/11~12 내국(內局)의 의관에 속해 있음. 돈화문 밖에서 대기하다가 입시(入侍)함. 제조들이 모여 여러 번 재촉한 후에야 허임이 느릿느릿 들어왔다며 사간원이 허임을 국문하라고 했으나 광해군이 따르지 않음.
※ 1614년(45세, 광해 6년) 6월 ~ 1615년(46세, 광해 7년) 5월 교동현감(喬洞縣監)

1615년(46세, 광해 7년)
11/26 광해군 치통치료<堂后日記草本>
11/28 광해군이 허임을 경기와 가까운 도의 수령으로 임명할 것을 지시함.

1616년(47세, 광해 8년)
1/ 23 영평현령(永平縣令)으로 임명됨.
11/ 27 여러 해 동안 입시(入侍)하여 침치료한 공로를 인정받아 자급을 더해 받게 됨.
※ 1616년(광해 8년) 1월~1617년(광해 9년) 3월 영평현령

1617년(48세, 광해 9년)
2/ 12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됨.
2/ 18~21, 25~26 허임이 천출이라는 이유로 사헌부가 왕에게 직위의 교체를 잇달아 간청하였으나 광해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
3/ 9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자리를 바꿈.
6/ 6 광해군 손에 난 종기가 위중하여 허임과 유대명을 부를 것을 경기감사에게 령을 내림.
6/ 21 임금에게 침을 놓고 임지로 돌아감
11/ 10 허임ㆍ유대명을 부를 것을 경기감사에게 령을 내림.
※ 1617년(광해 9년) 3월15일~1619년(광해 11년) 8월30일 : 부평부사

1618년(광해 10년)
4/10 이경석의 아버지 이유간 집에서 침치료 함.
4/14 이경석이 허임을 불러 이유간이 침을 맞음. 다른 의원들은 병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허임은 한 번에 알아보았다며 역시 허임의 유명함이 헛말이아니라고 표현함.
4/15 허임이 이유간 집에 가서 봄.
<愚谷日記>

1619년(50세, 광해 11년)
11/ 23 의약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포상시에 숙마(熟馬) 1필을 하사 받음.
12/ 13 모시고 있던 노모의 병세가 중한 까닭으로 자급을 더해 받음.

<노년> 조선 최초의 침구전문서인 침구경험방 간행

 허임은 인조 초기에도 내의원 침의로 활동한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나타납니다. 늘 백성들 가운데 살며 인술을 펼치고자 했던 허임은 중년이 지나서 공주에 정착했습니다. 공주는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수행하던 중에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허임은 갖가지 병을 고치는 한편, 자신의 경험을 후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침의들의 으뜸으로 추앙됐습니다.
허임은 늙어서 평생의 의술을 정리하여 침구경험방을 집필했습니다. 당시 영의정 김류는 '만백성을 건강하게 살도록 하려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이 책을 출판하도록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내의원 제조 이경석이 호남관찰사인 목성선에게 부탁하여 1644년(인조 22년) 마침내 침구경험방이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각종 외과질환과 응급증 등에 대한 대처가 절실히 요구되던 시기였습니다. 허임은 전란으로 고통 받고 신음하는 병자들을 돌보며 민중들과 함께 하였을 것입니다. 침구경험방의 발문을 쓴 당시 춘추관이면서 내의원 제조를 맡고 있던 이경석은 당대의 문장가였습니다. 그는 발문에서 허임과 침구경험방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의 허임은 평소에 신의 의술로 일컬어졌고 평생 동안 치료한 사람 손으로 꼽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경우도 많아 일세에 명성을 떨쳤으며 침의들에게서는 으뜸으로 추앙되었다. 지금 이 경험방의 글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손으로 시험해 본 것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분명하게 하고, 번거로운 것은 요약하고, 틀린 것은 바로잡았다. 질병의 원인과 치료의 중요한 묘방이 한번 책을 열면 곧바로 눈앞에 선명하니 간략하면서도 쉽고 요약되었으면서도 상세하다고 할 수 있다.”
허임은 그의 책 서문에서 “이제는 늙어서 그나마 올바른 법이 전해지지 못할까 근심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감히 스스로를 옛사람의 저술에 견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동안 고심한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읽는 사람들이 뜻을 더하여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며 당신이 세상을 하직한 이후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인술을 남겼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나타난 허임 관련 기록]
(나이는 1570년 생으로 추정하였음)

1622년(53세, 광해 14년) 4/ 6 남양부사(南陽府使)에 임명됨.
※ 1622년(광해 14년) 4월6일~1623년(광해 15년) 3월 : 남양부사

1623년(54세, 광해 15) 2/ 19 의관들의 경솔한 행위에 대한 광해군의 질책을 받고 물러감. 다른 어의 및 침의들과 더불어 문책을 받고 녹일등(祿一等)을 감봉 당함.

1623년(54세, 인조 원년) 3/26 경기감사가 남양부사 허임을 쫓아내라고 함


금강의 곰나루 옆 연미산 정상에서 바라본 침구경험방 집필지 전경. 이곳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허임의 공을 기리는 부조묘(不祧廟)가 있었다. 한국근대읍지 공산지(公山誌)에 허임의 부조묘가 우성면 내산리에 있다고 전하고, '인조조 공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강의 곰나루 옆 연미산 정상에서 바라본 침구경험방 집필지 전경. 이곳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허임의 공을 기리는 부조묘(不祧廟)가 있었다. 한국근대읍지 공산지(公山誌)에 허임의 부조묘가 우성면 내산리에 있다고 전하고, '인조조 공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628년(59세, 인조 6년)
4/ 14 침의 허임 등에게 반숙마 1필을 상으로 내림
10/ 22 침의 허임 등에게 표피(표범가죽) 1필을 내림. 내의원 도제조 김류, 이귀 에게도 호피(虎皮) 1릴 내림

1639년(70세, 인조 17년)
8/ 12 ‘허임의 의술이 지금의 의원보다 뛰어나다’며 임금의 청한(靑汗, 식은땀) 증세에허임의 침구치료를 받을 것을 의논함. 허임에게 병세를 써가지고 가서 물어보기로 함.
8/18 허임이 임금의 병에 대해 침뜸처방을 문서로 올림.

1641년(72세, 인조 19년) 5/ 19 장증(脹證)이 심한 재신(宰臣:재상)에게 침을 놓아 효험을 보게 한 공주에 사는 침의(鍼醫) 최우량이 허임에게서 침을 배운 사람이라고 내의원에서 계를 올림.

1644년(75세, 인조 22년) 침구경험방 간행